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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I 르그랑댕 씨
디아나§
2010. 12. 13. 13:26
마르셀 프루스트, <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> I
스완네 집 쪽으로 1 p.97
스완네 집 쪽으로 1 p.97
미사에서 돌아오는 길에, 우리는 자주 르그랑댕 씨를 만났다. ... 세상에는, 과학자로서의 경력에 훌륭히 성공한 이외에도, 그 직업상의 전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단지 회화에 이용되는, 다른 방면의 문학적·예술적 교양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, 그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. 그들은 하고많은 문학자보다도 조예가 깊고 (...) 하고많은 화가보다도 '능란함'을 타고나, 그들이 영위하는 생활은 십중팔구 그들에게 적합한 것이 못 된다고 상상하여, 그 실제의 일에, 혹은 변덕스러움이 섞인 돈단무심과, 혹은 변함없는, 오만한, 남을 깔보는, 쓰디쓴, 그러면서도 양심적인 근면성을 갖는 법이다. 덩치가 큰 몸, 당당한 풍채, 우수에 잠긴 듯한 푸른 눈에 명상적인 얼굴에는 갈색의 긴 콧수염, 세련된 예절, 우리가 여태껏 들어 본 적이 없을 만큼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는, 번번이 그를 보기로 들고 있는 우리 가족의 눈으로 본다면 삶을 보다 고상하게, 보다 우아하게 생각하는 선택된 인간의 전형이었다. 나의 할머니가 비난한 점으로 말하면 단지 그가 좀 지나치게 잘, 좀 지나치게 서적처럼 말하는 것, 그가 매고 있는 늘 펄럭이는 큼직한 나비 넥타이, 거의 소학생 옷처럼 단정한 윗도리 안에 있는 자연스러움이 그의 언어 속에 없다는 것이었다. 또한 할머니는, 그가 자주 귀족사회, 사교 생활, 그가 이른바 말하는 ' 바오로 성인께서, 용서받지 못하는 죄악에 대하여 언급하실 때, 머릿속에 생각하셨다고 여겨지는 죄악'인 속물 근성에 대하여 화염같은 독설을 퍼붓는 것을 놀라워하였다.
사교적인 야심이란, 할머니로서는 전혀 느낄 구 없는,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서, 그러한 야심을 때려누이려고 그처럼 극성스럽게 구는 게 쓸데없는 짓으로 보였던 것이다.
사교적인 야심이란, 할머니로서는 전혀 느낄 구 없는,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서, 그러한 야심을 때려누이려고 그처럼 극성스럽게 구는 게 쓸데없는 짓으로 보였던 것이다.